예전에 한참 대학교시절 (네이버블로그를 열심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던 시절에..)
한겨레 신문을 구독해서 보았습니다.
이글은 2008년도 사설란에 있었던 글인데요. 벌써 10여년 전이네요.. 시간참 빠르네 ;;
오랜만에 예전 다이어리를 뒤져보니 제가 잘라놓은 신문 꾸러미들에 있었더라구요.
지금 읽어도 유익한 글일거 같아서 공유합니다.
진작 네 아버지로부터 대학 진학 소식을 들었는데도, 밥 한 끼 먹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낯선 객지에서 강의 들으랴, 끼니 챙기랴 고생이 심하겠구나. 꼭 30년 전 이맘때 네 아버지와 나도 설레며 대학생활을 시작했지. 이 글은 대학에 남은 78학번 선배가 08학번 신입생에게 전하는 짤막한 당부쯤으로 들어주면 좋겠구나.
조선소에서 몸통을 드러낸 배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먼바다를 항해할 큰 배들은 나룻배와 달리 밑바닥 앞부분이 주둥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지. 이걸 ‘용골’이라 한다. 용골은 한바다의 풍랑에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쇠뭉치란다. 그렇다면 배는 역설적인 몸뚱이다. 빨리 목적지까지 가려면 제 몸을 가볍게 해야 마땅한데, 또 ‘제대로’ 항해하려 무거운 쇠뭉치를 매달아야 하는 역설 말이다. 네가 대학에서 이런 역설의 이치를 깨달았으면 한다.
대학은 말과 글로 이뤄진 곳이다. 말과 글에는 겉과 속이 있단다. 현란한 주장, 두툼한 책에 쓰인 글의 속살을 꿰뚫는 눈을 길러야 한다. 내용 없는 헛말, 증명할 수 없는 주장에는 속지 않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해부학 시간에는 드러난 거죽 아래에 결이 다른 속살이 있음을, 문학 시간에는 말글의 등 뒤에 또다른 뜻이 숨어 있음을 배우기 바란다. 세상사 이치가 겹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경망과 경박함으로 범하는 많은 잘못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늘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잘된 답변보다 어설픈 질문이 낫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교수님들은 잘 쓴 답안지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더 기꺼워하실 게다. 허나 질문이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 법. 책을 내 식대로 읽고, 낯익은 세상과 삶을 ‘낯설게’ 대하는 눈에서만 태어난다. 도서관은 시험공부 하는 장소가 아니라, 질문을 만들기 위한 자료 창고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
눈(안목)을 기르는 데는 고전만 한 것이 없더구나. 고전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져 나오는 샘 구실을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허나 상상력이란 환상이나 백일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고전을 창의력의 샘으로 지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과 세계의 근원성과 고유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곧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능이 아니라, 고전에 담긴 근원성과 고유성을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상력이란 멋대로 꾸는 망상이 아니라 그 속에 기본 문법이 깔려 있는 것이지. 고전에서 추출한 삶의 문법이 앞으로 60년 세월의 난바다를 헤쳐 나갈 배의 용골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태가 흉흉해서 대학도 쓰임새 있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처럼 변한 지 꽤 되었다. 기업이 요구하는 네모꼴·세모꼴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고 대학에 눈 흘긴 지도 꽤 된다.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무슨 큰 자랑인 세태가 됐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네가 기업이 요구하는 네모나 세모가 되어 그들의 쓰임새에 맞추고 난 다음에 또 너보다 더 정교한 네모나 세모가 나타나면 자연히 폐기처분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이것이 ‘삼팔선’이니 ‘오륙도’니 하는 시쳇말의 근원이다. 쓰임새 있는 인간, 실용주의 뒤에 숨어 있는 비인간주의를 잊어선 안 된다.
나는 네가 세모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일지언정, 너를 세모로 만들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앞으로 헤쳐갈 60년 세월 속에 너라는 배는 높고 낮은 파도의 모서리에 치여 휘청거리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 파도를 이겨낼 용골을 대학 속에서 만들어 내기를, 또 고전 속에서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건투를 빈다.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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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74169.html#csidx1976973c80181bbab5efd8c24a3cd14